() 해외배송 가능
도서명 | 요기예수 1 |
---|---|
판매가 | 7,500원 |
적립금 | 225원 |
수량 | |
저자(옮긴이) | 콜린 드실바 ㅣ 김철호 |
발행일 | 1999년 11월 |
도서정보 | 신국판 ㅣ 308 페이지 |
ISBN-13 | 2009693000029 |
수량 |
---|
예수의 알려지지 않은 18년간의 행적을 소재로한 소설
예수의 12세부터 30세에 이르는 18년 동안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과 세 동방박사들의 정체가 무엇이냐라는 신약성서에 잠재한 두 가지 미스터리를 축으로, 풍부하고 호소력 있는 묘사를 통해 광대한 서사 공간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사람의 아들이냐, 신의 아들이냐
콜린 드실바(Colin De Silva)는 독특한 이력의 작가다. 영국령 스리랑카에서 태어나 영국군 소속 문관을 지낸 그는 국제무역상 노릇을 하다가 하와이로 건너가 부동산개발업자로 성공한다. 뒤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모두 다섯 권의 장편소설과 한 권의 단편소설집을 냈으며, 현재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
이 책은 드실바의 최근작
영어본 미출간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이 소설이 [문제성]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문제성은, 이 작품이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냐 신의 아들이냐 하는, 기독교 내부의 고전적인 논쟁의 한가운데로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이 소설은 신약성서에 잠재한 두 가지 미스터리를 이야기의 공간으로 삼고 있다. 그 하나는 이른바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the lost years of Jesus)], 즉 12세부터 30세에 이르는 18년의 기간이다. 신약성서에 포함된 27권의 경전 어디에도 이 시기 예수의 행적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그동안 기독교계 안팎에서 커다란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어릴 적부터 주일학교에 다녔던 옮긴이도, [예수님]이 이 기간 동안 나사렛에 계속 머물면서 아버지 요셉으로부터 목수 도제수업을 받았다는 정도로밖에는 듣지 못했다. 성서학이나 신학에 문외한인 옮긴이가 이 책을 번역하던 도중 평소 지면이 있던 한 중견 신학자에게 문의해 본 결과, 역시나 [그 기간 동안 예수는 줄곧 나사렛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 작품이 소재로 삼고 있는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바로 예수 탄생에 참례했다는 동박박사들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도 위의 신학자에게 문의한 결과 [오리엔트 세계에서 온 점성술사 정도로 추측들을 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성서에 의하면 이들이 [밝게 빛나는 세 별]을 따라 서쪽으로 왔다고 하니 이들을 동방의 점성술사로 추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성싶다.
이러한 두 가지 의문(예수는 18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으며, 동방박사들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 콜린 드실바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18년이라는 기간 동안 인도에서 요가 수련을 했으며, 동박박사들은 오리엔트 세계에 속한 세 명의 소왕(小王)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이라는 허구적인 문학장르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소치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가정을 단지 가설로만 치부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예수의 인도 여행에 관한 그간의 적지 않은 주장들(이런 주장들은 나름대로 새로운 문헌증거와 정황증거에 기대고 있다)을 차치하더라도, 당시 근엄하기 이를 데 없던 유대교 전통에서 예수의 [돌연변이적] 사상이 자생적으로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소박한 물음을 던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예수의 출현은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서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그 혁명성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극성한 기독교라는 새 종교의 탄생을 불러올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유대교가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라는 존재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사실은 당시 예수가 펼친 가르침이 얼마나 [반역적]이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것은 성서에 대한 깊은 연구가 전혀 없는 배경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옮긴이의 단견으로도 구약성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면모와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이미지 사이에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소돔과 고모라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약시대의 유일신 야훼(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만을 향한 맹목적 충성을 요구하는 [질투의 신]이었으며, 자신의 명을 거역한 인간들에게 가차없이 벌을 내리는 [복수와 징벌의 신]이었다. 한마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이 시대의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예수가 남긴(혹은 그렇다고 성서에 기록된) 수많은 언행은 그가 도대체 자신을 낳은 유대민족의 종교적 전통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나 한 걸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발언을 통해 신성불가침의 안식일 교리에 정면으로 도전했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으로써 구약시대를 지배하던 복수와 응징의 논리에 맞섰다. 또한 그는 창녀, 문둥병자 등 유대사회에서 불가촉(不可觸) 집단으로 대접받던 사람들을 거리낌없이 껴안았으며, 타칭 [메시아]이자 [랍비]로서 {나는 사람들의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러 왔다}고 선언함으로써 권위의식과 교조주의에 물들어 있던 사제 계급을 통렬히 공박했다.
그러나 작가 콜린 드실바는 예수의 발언 가운데 정작 혁명적이었던 것은 따로 있다고 믿는다. 그에 따르면,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자신이 [신의 아들]이며 유대인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사람들 또한 [신의 아들]이라는 선언이었다.
섣부른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옮긴이의 감상을 말한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여호와는 물론이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다녀갔던 예수까지 [저 높은 곳]에 올려놓고 우러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이들은 예수를 [신의 아들]이라 칭하며, 이때의 신은 당연히 [하늘]에 계신 근엄무비한 존재다. 신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일 뿐이니, 신의 적자(嫡子)로서 세상에 내려온 예수는 당연히 피조물 인간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창조자의 반열에 든다. 이러한 신과 인간의 이분법에서는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라느니 모든 인간은 신의 아들이라느니 하는 목소리는 발붙일 구석이 없다.
그러니 세상 모든 사람이 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한 [요기 예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들을 만도 하며, 일부 극렬한 이들은 그에게 [사탄의 자식]이라는 딱지를 붙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니, [믿는 자]들이여 부디 흥분을 가라앉히시라.
작품 속 예수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그에 의하면 우리같이 평범한 인간들도 예수 자신과 마찬가지로 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셈이니, 이는 곧 인간이 신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한 발 물러서서, 우리 인간들이 어느 구석엔가는 신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라고 치자. 신에게서 물려받은 그 속성을 잘만 갈고 닦으면 우리도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니, 누구나 내면의 불성(佛性)을 꽃피우면 온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 붓다의 가르침과 한치의 오차도 없는 주장이 아닌가. 이미 세계적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붓다의 설법 사이의 본질적 유사성을 논구한 서적들도 여럿 나와 있는 마당에서 이와 같은 생각은 사실 새로운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드실바가 작중 예수의 입을 빌려 새삼스럽게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고 인간을 나누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혹자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말했었지만, 우리가 의식이 존재를 규정한다고 믿지 않는다면 현실을 창조할 힘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렇게 믿어보자. 의식이 현실을 만든다고. 분리된 의식이 분리된 현실을 만들어낸다. 인류가 학문과 학문을 나누고 종교와 과학을 나누고 육체와 정신을 나누고 물질과 의식을 나누고 성(聖)과 속(俗)을 나누고 인간과 자연을 나누고 나와 너를 나누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짓을 그만두면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더이상 신과 인간도 나누지 않는다면 예수는 신의 아들이자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 될 터.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몇 가지 양해를 구하려고 한다(번역의 미숙함이야 옮긴이의 능력부족 탓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이 점에 대해서는 해량을 바랄 뿐이다).
먼저,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말들 가운데 성서에 기록된 대목들은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개역판 성서의 표현을 따랐다. 현재 신·구교를 통틀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판본이라는 판단에서 결정한 일이니 특히 천주교에 속한 분들의 넓은 이해를 바란다(인명과 지명의 표기도 개역성경에 등장하는 경우 그에 준했으며, 성서에 나오지 않거나 작품의 흐름상 중요하지 않은 일부 로마인의 경우에는 현지발음대로 표기했음을 밝혀둔다).
다음으로, 현재 개신교에서 [하나님]으로 정착해 있는 표현을 매번 [하느님]으로 표기한 점에 대해서이다. 일부 열렬한(?) 분들의 항의를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굳이 이런 표현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이것도 옮긴이의 선입관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라는 표현에는 [하나뿐인 신], 즉 배타적 유일신 개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실려 있는 듯하고 왠지 기독교 근본주의 냄새가 배어 있는 느낌이다. 따라서 작중 예수의 종교적 관점을 가능한 한 폭넓은 것으로 해석하고 싶었던 옮긴이로서는 좀더 단순하게 [하늘에 계신 분], [하늘과 같은 분]의 어감을 풍기는 [하느님]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 점 또한 소설 속 공간이라는 특수성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